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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가는길

우리가족 2009. 2. 13. 09:16

친구에게 가는 길

 

 

친구에게서 온 뜻밖의 소식

살면서 잭 같은 친구를 만난다는 건 운이 좋은 사람이나 바랄 수 있는 일이리라. 첫 친구이자 가장 오래된 친구, 그런 친구는 꼭 같은 도시에 살 필요도, 매일 만나야 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오랜 우정에는 그런 조건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이 더 좋다면, 그런 친구가 오랫동안 곁에 있을 것이다.

 

잭을 처음 만난 때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오하이오 주, 벡슬리 캐싱엄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에서 처음 만났다. 아이들 모두가 유치원이라는 곳에 채 적응하기도 전인 어느 날 오후, 우리 반 아이들은 바버라 선생님을 빙 둘러싸고 교실 바닥에 앉아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입술에 코피가 흘러내렸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무도 모르게 손으로 코 밑을 닦았다. 그러나 피가 더 빨리, 더 많이 흘러나와 급기야 옷에 뚝뚝 떨어졌다. 그때 조금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던 아이가 일어나더니 선생님에게 외쳤다. 밥이 다쳤어요! 나는 모르는 아이였지만 그 아이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고, 나를 위해 용감하게 일어서서 나의 위기상황을 선생님께 알렸다. 잠시 후, 나는 양호실에 누워 있었고, 피범벅이던 얼굴은 깨끗해졌고 곧 괜찮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도 들었다.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주고, 나를 위기에서 구해준 그 아이가 바로 잭 로스였다.

 

다섯 살 두 꼬마는 어느새 쉰일곱이 되었다. 오랜 세월 우리는 많은 전화를 주고받았다. 특히 매년 3 10일이 되면 잭은 어김없이 내게 전화를 걸어, 3 25일에는 내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서로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내가 쉰일곱 번째 생일을 맞은 3 10일에도 잭은 전화를 걸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넨 쉰일곱이란 숫자가 끔찍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곧 일흔이 될 때가 온 거야. 하지만 우린 둘 다 몰랐다. 그 뒤 맞은 쉰일곱 번째 생일이 그가 이 땅에서 맞는 마지막 생일이 될 줄은…….

 

그해 3, 나는 플로리다의 해변에 있었다.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겨서 한 달 가까이 아침마다 해변을 거닐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친구 척에게서 전화가 왔다. 잭이 많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척은 잭과 함께 우리가 자란 콜럼버스에 살고 있어서 잭의 소식을 가장 빨리 알 수 있었는데, 잭이 얼마 전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은 결과, 뇌를 포함해서 이미 몸 전체에 암 세포가 퍼져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바로 시카고로 돌아가 고향에 살고 있는 잭에게 갈 준비를 한 후 비행기로 콜럼버스 공항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풀고 잭의 집으로 갔다.

 

그는 자신의 집 앞에 서 있었다. 내가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함축하는 우리 둘만의 의식이었다. 얼마 만에 다시 만나든, 우리 사이에는 별다른 준비나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약물치료와 병행해 방사선치료를 시작하면서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식사는 아마 우리가 천 번째 함께하는 식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함께 먹은 치즈버거만도 200개쯤 될까? 고등학교 시절, 우리 다섯, 그러니까 ABCDJ는 최고의 친구였다. 잭이 있었고, 나와 척 셴크, 대니 딕과 앨런 슐먼이 있었다. 우리는 이름의 철자순으로 오하이오의 ABCDJ(앨런, , , , )를 자처했는데, 우리 다섯은 여름밤이면 앨런의 푸른색 포드 자동차에 끼어 앉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을 따라 불렀고, 길고 긴 겨울의 주말 오후에는 별달리 할 일이 없어 근처 자동차 극장이나 패스트푸드점을 들락거리며 점심을 서너 번씩 먹었다. 우리는 십대의 많은 시간을 늘 그렇게 함께했다. A인 앨런은 콜럼버스의 유일한 호화 고층 아파트 꼭대기 층에 살았는데, 늘 어딘지 빈정대는 눈빛에 찡그린 표정을 하고는 유난히 거들먹거리며 걸었으며,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회사가 임대한 포드 차를 가지고 있어 늘 운전을 도맡았다. B는 나였고, C는 척이었다. 척의 아버지는 경제 상황이 천당과 지옥을 밥먹듯이 오가는 사업가였는데, 그런 변덕스런 집안 사정이 척에게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마음까지 어둡게 하지는 못했다. D인 댄은 우리 가운데 가장 키가 작았고, 굉장히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으며, 댄의 아버지는 콜럼버스에서 어물전을 운영했다. 그리고 J는 잭이었다.

 

한편 나는 시카고에서 콜럼버스로 떠나기 전에 앨런에게 전화를 걸었다. 캔톤에서 검사로 일하고 있는 앨런은 잭 얘기를 듣더니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재판까지 연기시킨 후 벡슬리로 오겠다고 했다. 나는 댄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댄은 콜럼버스 서쪽 지역에서 동생과 냉동창고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저녁 식사 모임 얘기를 듣고는 만사를 제쳐두고 참석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그날 저녁 우리 ABCDJ는 모이기로 한 것이다.

 

척은 더 탑(the Top)에 저녁식사를 예약했다. 당연히 더 탑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더 탑은 벡슬리 사람들에게 단순한 식당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가죽 좌석과 희미한 조명, 대도시 식당처럼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가 나는 더 탑은 벡슬리 사람들에게 마치 라스베이거스나 맨해튼에 온 것 같은 기분을 선사했다. 우리는 열여덟 살이 되면서부터 더 탑을 들락거리기 시작했고, 그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더 탑은 오랜 시간이 지난 그날 저녁까지 건재했고, 우리가 추억을 나눌 장소로 그보다 좋은 곳은 없었다. 마침내 우리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마치 어떤 변화도 없었던 것처럼. 다섯이 모두 모였지만 잭이 앓고 있는 병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잭이 처음부터 내 문제는 거론하지 말아줘!라는 뜻의 눈빛을 우리에게 던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되도록 재밌는 얘기를 하며 웃으려고 애썼는데, 우리는 함께 웃는 것만으로도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함께한 추억을 산책하며

그날 밤, 앨런과 나는 각각 예약한 호텔에 묵었고, 다음 날 척이 초대한 저녁식사 참석을 위해 척의 집으로 갔다. 척의 집은 무척 아름다운 호화 주택이었다. 야구 모자를 눌러쓴 잭은 척의 집 일광욕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양옆에는 척의 아내인 조이스와 잭의 아내 재니스가 앉아 있었는데, 둘은 쌍둥이 자매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다란 연회용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갑자기 잭이 나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음식에 간을 더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어리둥절했다. 음식은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기 때문이다. 잭이 다시 말했다. 내가 맛을 느끼지 못하거든. 그는 뇌에 방사선을 쪼여서 미각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핫소스를 찾으러 부엌으로 갔다. 식사를 끝내고 나서 잭은 내게 다음 날 같이 산책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고, 나는 당연히 그러자고 했다.

 

다음 날 앨런은 준비해야 할 재판이 있어 캔톤으로 돌아갔고, 나는 콜럼버스에 남았다. 잭과 함께 걷는 동안 나는 잭이 삶의 흔적을 되짚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함께 다닌 캐싱엄 초등학교 건물, 중학교 건물, 야구장, 고등학교 건물 앞 광장……, 곳곳이 다 우리의 추억들로 가득했다. 걸으면서 잭은 사업 이야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가 벌려놓은 사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걱정이었다. 잭은 도매 회사 몇 곳을 오랫동안 다닌 후, 자기 회사를 차려 단독으로 개발한 식품을 전국의 소매점에 판매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방사선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직접 운전을 할 수 없으니, 재니스에게 사무실까지 태워다달라고 말하기도 싫고. 나라면 재니스에게 부탁하겠네. 여하튼 지금은 사업을 잊게. 건강을 회복할 생각만 해. 하지만 그건 무책임한 말이었다. 내가 잭의 집에 날아드는 각종 청구서와 사무실 임대료를 처리해줄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잭은 몸 안의 암세포와 싸우면서 그런 걱정거리들을 해결해야만 했고, 그게 현실이었다.

 

잭은 또 말했다. 재니스가 걱정이야.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재니스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재니스를 생각하는 잭의 각별한 마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잭은 대학을 졸업한 후 시카고 인근에서 교사가 됐고, 곧 결혼했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았던 결혼 생활은 이내 끝나고 말았다. 이혼 후 상심에 빠져 있던 잭에게 척의 아내였던 조이스가 자신의 쌍둥이 자매인 재니스를 소개해줬다. 그래서 두 친구는 서로 동서지간이 되었다. 재니스와 결혼한 후, 교사를 그만둔 잭은 콜럼버스로 돌아와 아담한 서점을 열었다. 잭은 책은 물론이고 서점 일을 좋아했지만, 1주일 동안 책을 팔아 번 돈으로 다음 주를 근근이 살아가야 했다. 반면 척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둘이 쌍둥이 자매와 결혼한 것이다. 잭은 재니스를 지극히 사랑했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게 해주고 싶어 한다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았다. 그러나 그는 곧 이 땅을 떠나야 한다.

 

그날부터 잭은 사무실 전화를 착신 전환을 해두고 집에서 업무 관련 전화를 받았다. 그는 밤마다 복통을 호소하며 잠에서 깨면서도 버틸 수 있는 데까지 시간을 할애해서 컴퓨터와 실랑이하며 전화 메시지를 확인하고 메일에 답장했다. 한편 잭은 나날이 살이 빠지고 있었다. 먹을 것을 제대로 삼키지 못했고, 식욕도 잃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계속 함께 산책을 했다. 산책하면서 잭은 내게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말했다. 전에는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것까지. 우리가 걸었던 다른 삶의 행로에 대해서도 얘기를 주고받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는 각기 다른 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신문기자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 사립대학인 일리노이 주 노스웨스턴 대학에 진학한 반면,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잭은 학비가 비싸지 않은 오하이오 주립 대학에 진학했다. 잭의 아버지는 잭에게 주립 대학에 진학하라고 말하면서 경제적 이유까지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전에 보았던 잭의 아버지는 조용하고 검소한 사람이었다. 해 뜨기 전에 일하러 나가서 늦은 밤에야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 충실한 가장이었다. 그분은 혼자 간직한 비밀과 슬픔이 너무 많았다.   

 

내년에는 자넬 볼 수 없겠지

나는 시카고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잭에게 전화를 걸었다. 잭이 괜찮은지 확인하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하루의 주요 일과 같았다. 우리는 변함없이 자주 전화를 주고받았지만 서로에게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슬픔이 생겼다는 건 예전과 달랐다. 그리고 말로 한 번도 표현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알았다. 그리고 그가 이 땅에 살아 있는 그날까지 전화로는 그 슬픔을 결코 이야기하지 않으리란 사실도. 시카고에 돌아오자 척은 내가 컴퓨터를 켜자마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날 아침도 우리는 특별한 일 없이 메지시를 주고받았는데, 척은 평범한 아침 인사를 건네다가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그만 가봐야겠어. 잭을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해. 거기서 잭의 머리를 찐빵처럼 만들어주거든. 척은 잭이 방사선치료와 약물치료를 받도록 병원에 데려가고 치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집에 데려다주었다. 시간도 품도 많이 드는 일이었는데도 척은 내게 그런 식으로 말했다. 대단찮은 일이라는 듯,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루는 잭이 전화로 말했다. 오늘은 소풍을 다녀왔어. 잭은 해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소풍을 가는데, 그 연례행사 비용의 일부를 떠맡을 정도로 좋아하는 모임이었다. 하지만 그가 첫마디를 끝마치기도 전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어땠나? 좋았어. 잠깐만…… 눈물이 나는군……. 그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기다렸다. 잠시 후, 그가 입을 뗐다. 내년에도 그 사람들이 보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럴 수 없겠지만….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있었다.

 

콜럼버스로 돌아가기 며칠 전, 잭이 자동응답기에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 물어볼 게 있어. 전화 주게. 그런데 그 메시지에서 나는 뭔가 화급한 잭의 심정을 느꼈다. 지나간 일이 생각났다. 내가 좌절과 절망으로 최악의 상황에 빠졌을 때 내 곁을 오래 지켜주는 친구. 적어도 잭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내가 힘들고 중대한 고비를 맞았을 때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고, 아이들과 나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잭이었다. 시카고야. 오늘 아침 첫 비행기를 탔어. 자네가 아무도 만나고 싶어하지 않으리란 걸 알아. 방금 호텔에 들어왔어. 계속 여기 있을 테니까 내가 자넬 위해 할 일이 있다면 언제라도 연락하게. 잭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내가 도움을 청하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있어주는 것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는 세상의 어떤 남자도 원하지 않을 일, 아내의 사망 증명서를 떼는 일을 대신 해주었고,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었으며, 내 곁에서는 침묵을 함께 나누었다. 물어볼 게 있다는 그의 음성 메시지를 받았을 때 나는 그때를 떠올렸다. 지금 그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이제 내가 그의 곁에 있을 차례다.

 

내가 전화하자 잭이 물었다. 자네 어머니는 장기 간병인 구하는 법을 아실까? 환자였던 그에게는 기본적인 문제였지만, 아마 그 말을 꺼내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그런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나는 영 잼병이었다. 그러나 잭은 어떤 문제에나 적절한 답을 주는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는 걸 알았다. 내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또한 우리 어머니가 자신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도 잭은 알고 있었다. 잭은 50여 년 동안 보아온 우리 어머니에게 기대고 싶었던 것이다. 잭의 부모님은 오래 전에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는 우리 어머니 외에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나는 바로 어머니에게 전화했고, 어머니는 나의 말을 채 다 듣기도 전에 자신에 찬 대답을 들려주었다. 누구에게 전화해야 하는지는 알지. 하지만 먼저 잭과 재니스가 어떤 보험에 들었는지 알아보거라. 85세인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반드시 잘 해내겠다는 의욕이 담겨 있었다.

 

나는 다시 콜럼버스로, 잭의 집으로 갔다. 잭은 빙긋이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그 사이에 몸이 무척 여윈 듯 했다. 잭은 직접 운전대를 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더 탑에서 편안한 저녁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잭은 옛날처럼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주도했고 우리는 마음껏 웃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안색에서 어두운 빛을, 그의 눈에서 쓸쓸한 기운을 보았다. 잭은 그날 아침, CT 촬영 결과를 전해 들었다. 새로 시도한 치료법이 전혀 통하지 않았고, 호전되기는커녕 암이 점점 더 크게 퍼져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내가 콜럼버스에 있는 동안, 나는 거의 매일 잭과 산책을 했다. 의사들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혼자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잭에게 딱 맞는 산책 친구였다. 우리는 브리든 거리를 따라 걸었다. 잭이 말했다. 재니스와 마렌(잭의 딸) 때문에라도 떠나고 싶지 않아. 매일 아침에 잠에서 깨면 그들이 내 곁에 있고, 한 지붕 아래에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내가 떠난다면…….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어.

 

기억할 수 있는 한 오래

그 즈음 잭은 재니스와 함께 간병인 제도(나의 어머니가 상세하게 알려준)를 조사했지만 아직 간병인이 집에 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때를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의사들이 다른 약물치료를 권했지만 기대만큼 효과가 없었다. 한편 우리의 산책은 계속되었고, 산책할 때마다 옛날과 달라진 곳들을 둘러보았다. 메인 거리의 건물 대부분은 그대로였지만 간판과 주인이 바뀌고 취급하는 상품이 달라졌다. 우리는 낯선 상점 간판들을 따라 걸으며 그 위에 드리워진 과거를 보고 있었다.

 

얼마 후 나는 시카고에 가서 한동안 있다가 왔고, 그 사이 잭은 가보길 원했던 뉴욕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센터에 다녀왔다. 그러나 그가 학수고대하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곳 의사들의 얘기도 다른 의사들의 얘기와 다르지 않았다. 낙관할 근거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전화벨이 울렸다. 잭이었다. 재니스가 오늘 저녁에 나를 어떤 모임에 데려갔네. 비슷한 경험을 가진 암환자와 그 가족들이 정보를 주고받음으로써 위로를 얻고자 하는 모임이었다는데, 잭은 이렇게 말했다. 밥…… 그들이 너무 안됐어.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너도 똑같은 처지잖아?  나보다 더 오랫동안 앓던 사람들이야. 정말로 아파서 견디기 힘든 것처럼 보였어. 그들을 보니까 내 가슴이 찢어질듯 아팠어. 그것이 그가 밤늦게 전화한 이유였다. 자신의 고통 때문에 전화한 것도 아니고, 겨우 그날 저녁을 함께한 낯선 사람이 겪는 아픔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잭은 어릴 적부터 그랬다. 학창 시절, 잭을 잘 모르던 아이들도 그에게 농담 삼아 품위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잭이 앨런을 보고 싶어 해서 내가 앨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선약으로 오하이오 정치계와 법조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참석하는 모금 행사가 있었는데도, 앨런은 일정을 바꿔 부인까지 데리고 콜럼버스로 왔다. 척과 댄은 다른 일이 있어 오지 못했고, 나와 앨런 부부는 더 탑에서 만났다. 앨런은 잭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아니 지난번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모습으로 나타나길 바라며 잭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잭과 재니스가 들어왔다. 잭이 우리를 보고 싱긋이 웃어 보였다. , 맙소사! 앨런은 나지막이 탄식했지만, 얼굴만은 환히 웃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벌려 잭을 맞았다. 내가 잠시 시카고에 가 있던 사이에 잭의 상태는 더 나빠진 듯했다.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눈빛도 많이 흐려졌다. 앨런은 잭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해주려는 듯 계속 환히 웃었다. 그러나 앨런이 살짝 눈길을 돌렸을 때 나는 보았다. 그의 웃는 눈에 맺혀 있는 눈물을. 잭은 기운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고, 우리와 함께 오래 있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우리 테이블을 수놓은 웃음은 정교하게 구성된 시나리오에 따른 웃음 같았다. 우리는 아픈 가슴은 꼭꼭 숨긴 채 입으로만 웃고 있었다.

 

내가 시카고로 돌아온 후 잭은 산소통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잭에게서 곧 전화가 왔다. 한밤중에 잠을 깼어. 숨을 쉬기가 어려워서. 재니스까지 깨웠어. 그리고 내가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을 생각했다고 말했네. 잭은 우리 삶이 긴 여정을 헤쳐 가는 것이라 믿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그 길의 어디에도 있지 않은 때가 오면 어떻게 될까? 모두 여전히 그 집에 있는데 자네만 없다면 어떻게 되겠나? 나는 더듬거렸다. 누구나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겠지……. 그는 내 말을 끊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갑자기 자네가 존재조차 하지 않은 것처럼 여긴다면?

 

그는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죽음은 삶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알고 사랑했던 모든 사람과 여전히 함께 있는데도 그를 없는 사람처럼 여긴다고. 잭은 그런 상황을 슬퍼하고, 또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가 결코 그를 우리 삶 밖으로 밀어내지 않았다고. 아니, 설사 그가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와 함께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콜럼버스에 도착했을 때 잭은 병원에 있었다. 잭이 밤에 다시 호흡 곤란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잭은 병원에서 지냈는데, 검사 결과가 좋으면 다음 날 아침에 퇴원할 예정이었다. 잭의 딸 마렌이 직장에 무기한 휴가를 내고 집에 와 있었다. 아마 잭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곳에 머물 것이다. 마렌은 20대 중반의 영리하고 예쁜 아가씨였고, 고향과 부모 곁을 떠나 뉴욕 맨해튼에서 새로운 삶에 훌륭하게 적응하고 있었다. 잭은 그런 마렌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겼다. 딸이 그렇게 가까이 있다는 게 분명히 잭에게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호흡이 정상으로 회복되자, 잭은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잭은 특수 장치가 달린 병원용 침대에 누워지내야 했다. 그리고 잭은 비록 날로 병세가 악화되고 있었지만,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오늘 세상에서 제일 멋진 카드를 받았네. 바버라 선생님이 보낸 거군. 그가 깜짝 놀라 물었다. 누가 벌써 네게 말했어? 아니. 자네에게 세상에서 제일 멋진 카드를 보낼 사람이 바버라 선생님말고 누가 있겠어? 그는 미소를 띠고 내게 카드를 건넸다. 우리가 유치원생일 때 잭이 내가 코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도움을 요청한 사람. 우리 우정이 맺어지던 순간의 첫 목격자. 바버라 선생님은 벌써 일흔을 훌쩍 넘기셨는데,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에게 언제나 멋진 카드를 보냈다. 그러나 잭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데 밥, 이젠 이런 것마저 싫어.

 

굿바이,

다음 날 아침, 잭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입는 헐렁한 바지에 스웨터를 입고 산소 호흡기를 꽂은 채. 잭은 일로 맺어진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근래에 체결한 계약. 즉 물건이 계속 거래되는 한 꾸준히 수수료가 나올 계약에 추가 합의를 부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그의 몫을 재니스에게 보내달라고 했다. 그것이 그가 산소호흡기 신세를 지면서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해낸 일이었다. 아래층 부엌에서 재니스와 마렌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마렌이 집에 돌아온 후로 잭의 집에서도 사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고, 가족의 따뜻하고 정겨운 분위기가 새롭게 감돌았다. 잭이 위층에서 무엇을 하는지 그들은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남게 될 그 둘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다음 날, 잭의 집에 갔더니 간병인이 와 있었다. 잭은 산소관을 통해 숨을 쉬고, 간병인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잭에게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는 잭에게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다. 잭이 말했다. 며칠 전에 체중을 쟀는데 63.5킬로그램까지 줄었더군요. 56킬로그램까지 떨어지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체중을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암세포 때문에 체중을 회복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65킬로그램까지만 회복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가르쳐줘요. 잭은 마지막 순간까지 불가능에 도전하려 했다.

 

시카고로 떠나기 전날, 그날도 잭의 집으로 가려고 호텔을 나섰는데 시장기가 돌았다. 잭도 배가 고플 거란 생각이 들어 나는 루비노로 향했다. 1954년에 메인 거리에 문을 연 피자집 루비노는 우리 단골집이었다. 피자를 사가면 잭이 좋아할까? 잭이 아니더라도 재니스와 마렌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여름이 끝난 지 오래여서 날씨가 꽤 추웠는데, 비까지 내려 옷이 순식간에 젖었다. 나는 루비노 피자 가게에서 피자를 사 가지고 잭의 집으로 향했다. 잭이 나를 보고 말했다. 날 주려고 피자를 사 왔나? 달리 사 올 게 없더라고. 좀 피곤해. 그래. 좀 자게나. 산책이나 하고 올게. 그러자 잭이 비에 젖은 내 옷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자네, 그런 차림으로 밖에 나가면 얼어죽을 거야. 괜찮아. 잭이 재니스를 불러서 말했다. 벽장에 검은색 재킷이 있을 거요. 밥이 뭘 입고 있는지 좀 봐요. 재킷을 입지 않으면 절대 보내지 말아요. 잭이 다시 내게 말했다. 재킷을 입지 않고는 안 나가겠다고 약속해주게. . 알았네. 나는 잭의 재킷을 입고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전히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50년도 더 전에 밥이 다쳤어요!라고 말했던 것처럼.

 

며칠 후 잭은 바다를 보고 싶어했다. 그와 오랫동안 거래를 해온 뉴욕의 친구가 플로리다에 별장을 빌려주었지만, 이제 잭은 산소통을 항상 옆에 끼고서 거의 침대에 누워서 지냈기 때문에 거기까지 가는 것이 문제였다. 척이 나서서 항공기를 빌려주는 회사에 전화를 걸어 객실 기압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소형 항공기를 빌렸고, 잭과 재니스와 마렌, 척과 조이스는 그 비행기를 타고 플로리다로 가서 사흘을 보냈다. 잭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 기운을 되찾은 듯 저녁에 외식을 하러 나갔다고 했고, 다음에는 동행할 수 있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리고 스키도 타고 싶다고 했다. 나는 척과 전화 통화를 하다가 잭이 스키를 타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척이 나지막이 물었다. 잭이 정말 그렇게 말했나? 나도 놀랐어. 몸이 좋아졌나 봐. 척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잭은 이제 제대로 걷지도 못해. 잭은 꿈을 꾸고 있었다. 깨어 있었지만 꿈을 꾸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한 주 앞둔 금요일, 나는 시카고 미시간 호수 주변을 걷고 있었다. 완연한 겨울이었다. 척에게서 전화가 왔다. 잭이 아주 좋지 않아. 벌써 이틀째 밤마다 숨을 못 쉬겠다고 재니스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양이야. 이제 끝에 온 것 같아. 나는 척에게 당장 가겠다고 하고 집으로 와서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짐을 싸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다시 척이였다. 왠지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잭이 죽었어. 우리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척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뭘 좀 사려고 잠깐 나갔다 와 보니 잭이 죽었더라고. 재니스가 잭의 임종을 지켜봤다고 했다. 마렌은 친구들을 만나려고 뉴욕에 가 있었다. 잭이 재니스에게 말했다는데, 자네가 친구를 대표해서 조사(弔辭)를 해주길 바랐다는군. 혹시 잭이 그런 부탁을 미리 했나? 그런 부탁은 없었어. 하지만 그럴 생각이었어. 척은 앨런에게 전화하겠다며, 내게는 댄에게 전화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잭의 장례식 날, 진눈깨비가 휘몰아쳤다. 조사를 하기는 했지만 뭐라고 했는지 한마디도 기억나지 않았다. 장례식을 끝내고 관 뒤를 따라 걷다가 잭에게 그 사람이 여기 왔다고 꼭 말해주고 싶은 누군가를 보았다. , 이 자리에 지금 누가 있는지 알겠나? 여기에 참석한 모든 조문객을 대신하고 남을 분이지. 뒤에서 네 번째 줄, 문에서 네 번째 줄에 70대 노파 한 분이 앉아 있었다. 바버라 선생님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손을 꼭 잡았고, 선생님도 내 손을 맞잡아주셨다.

 

잭은 떠났지만 우리 우정은 죽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삶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것, 그것이 우정이다. 잭의 장례식 날처럼 그렇게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에는 우정의 흔적을 마음에 간직하거나 살피기가 어렵겠지만, 결국 눈과 얼음이 녹는 봄이 올 것이다. 또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사방을 수놓는 밤과 함께 여름이 찾아올 것이다. 그 모든 밤은 세상 모든 친구들을 위한 밤, 옛 친구와 새 친구들이 함께할 추억을 만들어줄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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